유난히 잠자리 소식 뜸한 올 여름
태풍이 적어 동남아서 된장잠자리 못 올라와
성충은 물론 유충까지도 공포의 포식자

 

 

2만개가 넙는 홑눈이 모여 겹눈을 구성하고 있는 잠자리의 눈을 확대한 모습. /Alamy

 

밤마다 들려오는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 여름이 저만치 떠나가고 있음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올 여름은 참 여름같지 않았다고 얘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찌는듯한 무더위도 덜한 편이었고, 하루에도 몇번씩 빗줄기가 쏟아지면서 시원한 차원을 넘어 한기가 느껴지는 날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 말고도 여름이 짧고 적적하게 느껴진 까닭이 있습니다. 여름을 여름답게 해주는 전령사, 벌레들이 부쩍 눈에 안 보였거든요. 벌레들도 코로나 때문에 사회적 봉쇄 조치를 취한 것일까요? 매미들의 울음소리도 예전만 못한 듯 하고, 풀숲을 호령하는 방아깨비와 버마재비들도 어지간해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맵시있는 몸매와 날개빛깔이 아름다운 물잠자리. /국립생물자원관 홈페이지

 

무엇보다도 도드라졌던 것은 시야에서 확 줄어든 잠자리들이었습니다. 동산과 개울가, 도심의 가로수 할 것 없이 이맘때쯤 어지러울 정도로 하늘을 뒤덮던 잠자리때가 왜 이렇게 안보이느냐는 얘기들이 올여름 적지 않게 들렸습니다. 때마침 잠자리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하다는 독자님의 제보도 답지했습니다. 저 역시 정말 궁금합니다. 그 많던 잠자리들은 대체 어디로 간걸까요? 국내 대표적 잠자리 전문가인 한국잠자리연구회장 정광수 박사는 2021년 여름 잠자리 실종 사건에 대해 예년과 다른 날씨 패턴에다 일종의 착시 현상이 합쳐지면서 생긴 결과라고 진단했습니다.

 

 

올 여름 '잠자리 실종사건'의 주인공이 돼버린 된장잠자리. 가장 흔하게 볼 수있는 잠자리이면서 가장 먼 거리를 여행하는 잠자리 중 하나이다. /국립생물자원관 홈페이지

 

여기서 말하는 ‘착시’라 함은, 특정 종의 활동이 두드러지다보니 마치 이를 잠자리 종 전체인 것처럼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종이 바로 된장잠자리입니다. 왕성한 번식력과 뛰어난 환경적응력 때문에 8월을 전후해 전국적으로 도시와 농촌 할 것 없이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잠자리가 됐습니다. 다소 역설적인 것은 이 토종느낌 물씬한 잠자리가 실제로는 ‘외국물먹은 잠자리’라는 점이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토종 생태계를 파괴하는 외래유해종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새로 말하자면 철새인셈이죠. 계절을 타고 저 멀리 적도가 가까운 동남아에서 올라와 한철을 지내고 가는 여행객입니다. 겨울을 나기에 한국은 너무 춥기 때문이죠.

 

 

가왕 조용필의 노래 제목으로도 친숙한 고추잠자리. /국립생물자원관 홈페이지

 

그런데 이들이 한국까지 와서 한철을 지내기 위해서는 바람을 잘 타야 합니다. 초여름 태풍불때를 전후해서 적도에서 한반도를 향해 이동하는 기류는 된장잠자리의 한국행을 위해 더없이 중요합니다. 이걸 잘 타야 원활하게 도착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만일 여름철 태풍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일단 자연재해의 공포를 벗어날 수 있어서 좋지만, 잠자리들 입장에선 애써 준비한 한국행이 무산될 수도 있는 위기가 됩니다. 공교롭게도 올 여름이 정말 드물게 태풍이 거의 없다시피한 여름이 돼버렸고, 결과적으로 한국행 티켓을 예약하고 기다리던 최대 수억마리의 잠자리들은 고스란히 발만 동동 구르는 상황이 돼버렸죠.

 

 

잠자리는 애벌레 어른벌레 할 것 없이 뛰어난 사냥꾼이다. 방금 잡은 먹이를 먹고 있는 북방아시아실잠자리. /한국잠자리연구회 페이스북

 

이렇게 여행거리가 먼 된장잠자리들을 제외한 다른 종류의 잠자리들은 변함없이 짝을 짓고 알을 낳고 부화를 하고 변태를 하는 등 생명의 바퀴를 부지런히 굴리고 있는 중입니다. 초여름부터 한가위 무렵까지 우리 하늘을 호령하는 이들 잠자리들은 사람의 눈으로 보면 낭만과 목가적 상징이지요. 하지만, 작은 벌레와 올챙이, 물고기들에게는 ‘잠자리 없는 세상’이 더없는 희소식일지도 모릅니다. 잠자리는 여느 곤충과 마찬가지로 애벌레와 어른벌레의 모습이 아주 다른 동물인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서운 식탐을 자랑하는 잔혹한 사냥꾼이라는 것이죠. 매미의 애벌레는 굼벵이, 파리의 애벌레는 구더기, 모기의 애벌레는 장구벌레라고 하죠? 잠자리의 애벌레는 학배기입니다. 어른벌레로 거듭나기 전까지 물속에서 지내죠.

 

 

날개 끝의 진한 무늬가 한눈에 들어오는 깃동잠자리. /국립생물자원관 홈페이지

 

하늘의 사냥꾼인 부모들 못지 않은, 아니 어쩌면 그 보다 더 한 살육병기입니다. 종류에 따라서 물속에서 몇 달 정도 사는 녀석도 있는가 하면 몇 년씩 사는 굼벵이 스타일도 있습니다. 기다란 몸에 옆에 다리가 달린 학배기는 때로는 새우나 가재를 연상케도 합니다. 이들에겐 갑각류에게 없는 치명적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아랫입술입니다. 평소에 입아래에 다소곳하게 오무리고 있던 아랫입술은 사냥감을 향해 돌진하고 먹잇감을 단단히 움켜쥐도록 도와줍니다.

 

 

학배기의 아랫입술에 걸려든 올챙이 한마리가 개구리가 되기도 전 짧은 삶을 마감하는 영상. 일단 걸려들면 살아있는 먹잇감의 속살을 파고들어 뼈와 내장, 가죽까지 모두 먹어치운다. /PlanetTooToo 동영상캡처

 

그리고 나서 잡힌 것이 무엇이든, 올챙이든, 송사리든, 물벌레든 포식하기 시작합니다. 멀쩡했던 올챙이나 물고기가 순식간에 가루가 돼 살과, 뼈, 내장, 껍데기가 사라지고 (여전히 꿈벅이는) 두 눈만 남는 처참한 광경이 종종 펼쳐지죠. 어떤 종류의 학배기는 꼬리 끝에 아가미까지 달려있을 정도로 수중 생활에 뛰어나게 적응했습니다.

 

 

잠자리 애벌레 학배기를 근접 촬영한 모습. 어른 벌레못지 않은 사냥꾼이며 포식자다. /한국잠자리연구회 페이스북

 

이 학배기가 때가 돼 어른벌레로 거듭나면 나비·등에·파리·모기 등을 닥치는대로 잡아먹는 하늘의 사냥꾼으로 거듭납니다. 그래도 조심해야죠. 언제 어디든 한 방에 훅 갈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어린 학배기 시절 버둥거리는 올챙이를 그자리에서 난도질해 먹어치우며 공포의 식사법을 자랑했던 그 녀석이 어른이 된 뒤 짝을 짓고 알을 낳으러 연못 근처를 맴돌다가, 개구리들에게 졸지에 잡아먹히며 뒤늦은 복수를 당하는 경우도 종종 벌어집니다.

https://tv.kakao.com/v/422157212

 

 

그야말로 개구리와 잠자리는 애증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로서는 잠자리의 사냥감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위의 PlanetTooToo 동영상은 올챙이를 잡아먹는 학배기, 그리고 아래는 잠자리를 포식하는 개구리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입니다.

https://tv.kakao.com/v/422157216

 

잠자리의 눈은 그 어떤 벌레의 눈보다도 치명적이고 괴기스러우면서도 탄성을 자아내는 매혹덩어리입니다. 2만여개의 작은 홑눈이 모여서 구성한 겹눈은 볼때마다 빨려들어가는 신비로운 느낌입니다. 주의력 환기나 집중이 필요할 때 한 번 확대된 잠자리 얼굴의 사진을 보세요. 그리고 상상해보세요. 잠자리가 지금보다 50배만 더 컸더라면. 모골이 송연해지기도 하고, 그 2만개의 눈을 가진 얼굴에 묘하게 빨려들어가기도 합니다. 이 기묘하고 매력적인 벌레는 전세계에 5000여종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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