徐康佑印
金樽美酒千人血 (금준미주천인혈)
玉盤佳肴萬姓膏 (옥반가효만성고)
燭淚落時民淚落 (촉루낙시민루락)
歌聲高處怨聲高 (가성고처원성고)
금잔 좋은 술은 천 사람 피요
옥쟁반 위 좋은 안주는 만백성 기름이라
촛농 떨어질 때 백성들 눈물은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높더라
이 글을 보고 운봉 현감은 말을
거꾸로 뒤집어 타고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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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공주 이야기
스웨덴 빅토리아 공주의 사랑 이야기
스웨덴 의 빅토리아 공주 (32 세)
스웨덴 왕위 계승법에 의해 연장자 우선으로
남동생 칼 필립 보다 앞서 왕위 계승권 1 순위로 차기
스웨덴 여왕.
미국 예일 대학 에서 정치학과 역사를 공부
워싱턴 스웨덴 대사관에서 트레이닝
뉴욕 유엔 본부 에서 트레이닝 ,
5 개 국어를 구사하며 미모와 학식을 겸비한
미래의 여왕 공주의 세례식
스웨덴어 뿐 아니라, 영어, 불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
5 개국어를 구사하며
장차 군주가 되기 위한 고된 견습 과정도 훌륭히 수행해 내고 있다.
운명적인 만남
8 년전 공주는 스웨덴의 작은 마을 오켈보의 헬스 클럽에서
클럽 운동 코치 다니엘을 만났다 .
다이어트를 위해 헬스 클럽을 찾은 빅토리아 공주는
소박하면서도 야성적인 그의 남성미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공주가 하필이면 진한 시골 사투리를 쓰고 장발에 야구모자,
낡은 청바지 차림을 즐기는 '평민'과 사랑에 빠진 것은
스웨덴 귀족 사회에서 놀림감이 됐다.
다니엘의 아버지는 시골 면사무소 직원이고
어머니는 우체국에서 편지 분류 작업을 하는 하급 직원으로,
집안 배경도 '부마 (왕의 사위) 감' 이 아니었다.
공주의 아버지 카를 구스타브(Gustav) 국왕은 공주에게 헤어질 것을 강요했지만,
공주의 고집이 계속되자 결국 포기, 두 사람의 결혼을 마지못해 승낙.
그러나 교양이나 학식이 미흡한 청년을 미래 여왕의 부군으로 맞이하게 된
왕실에서는 비상한 조치를 강구. '시골뜨기'를 '초일류 국제 신사'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시켰다.
궁중 전문가들이 개인 교사로 달라붙어 영어, 불어, 독일어를 가르치고,
궁중 예절과 스웨덴 왕가의 역사, 국제 정치학 등을 교습시켰다.
왕가의 의뢰를 받은 홍보 전문가들은 스웨덴 최고의 재단사와 이용사,
스타일리스트들을 동원해 그의 이미지를 ' 최고 상류층 인사 ' 와 같은
모습으 로 변신시켰다. 최근 언론에 노출되는 다니엘은 깔끔한 외모와
세련된 매너를 갖춘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상류 신사의 모습이다.
평민 신분에서 일약 ' 왕자 (Prince)'가 될 다니엘 웨스틀링 의 변신
장발을 짧게 자르고 야구 모자와 헤진 청바지를 벗어 버리고
우아하고 세련된 상류 인사로 변신한 행운의 청년 다니엘 웨스틀링
신분의 차이, 세간의 비난 온갖 장애와 벽을 극복하고 키워 온
두 젊은이의 사랑.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브 16 세 , 실비아 왕비 와 빅토리아 공주,
다니엘 웨스틀링
<
공주가 가장 좋아하는 티아라 (작은 관)
대 성당에서의 예식에서도 이 티아라 착용
약혼 공표 후 왼쪽
다니엘의 아버지(면 사무소 직원) 어머니 ( 우체국 우편물 분류원)
오른쪽 국왕 과 왕비
사랑의 승리
영국 찰스 왕세자와 고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결혼식 이후
가장 성대한 왕가의 결혼식이 스웨덴에서 열렸다.
스웨덴 칼 구스타프 16 세 국왕의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빅토리아(32 세) 공주와
그의 개인 운동강사였던 다니엘 베스틀링(36 세)이 19일 스톡홀름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에는 덴마크, 노르웨이 왕족과 핀란드 대통령과 아이슬란드 대통령 등
유럽 각국의 지도자 1000 여명이 참석했다.
빅토리아 공주는 섭식 장애를 앓던 2002년 스톡홀름의 체육관에서 베스틀링을 만나
지난해 2월 약혼했다.
넙적한 얼굴과 시골 사투리로 ‘개구리 왕자’라는 조롱을 받았던 베스틀링은
이날 결혼식에서 성혼 서약 중 기쁨의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결혼식 후 공주 부부는 무개 마차를 타고 4 만 송이의 장미, 카네이션 등이
장식된 거리를 6.4 ㎞ 행진했다.
이날 스톡홀름 거리에는 25 만여명의 시민들이 나가 이들의 결혼을 축하했다.
빅토리아 공주는 시민들을 향해 “나에게 왕자를 준 스웨덴 국민들에게 감사한다.
너무나도 행복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빅토리아 공주 칼 필립 왕자 , 마딜렌 공주 칼 구스타프 국왕 과 실비아 왕비
평민을 사랑한 공주, 결혼에 성공,
신분의 벽을 뛰어넘은 두 사람 8 년간의 연애 끝에 스톡홀름 대성당에서
‘동화 같은’ 결혼 예식
결혼식 행사를 위해 총 6000 명의 군인과 2000 명의 경찰이 스톡홀름 시내에
배치됐고 군함 22 대와 전투기 18 대가 동원.
부부가 스톡홀름 궁에 도착했을 때 300 명의 대 합창단이 환영 합창.
175 만 유로 (약 30 억 원)짜리 호화 결혼식 비용은 국왕과 정부 예산에서 절반씩 부담.
이날은 34 년 전 공주의 부모인 칼 구스타프 16 세 국왕이 실비아 왕비와 결혼식을 치른 날.
공주는 부모의 결혼식 당시 사용했던 왕관과 베일을 그대로 쓴 채 등장.
결혼식에는 베아트릭스 네덜란드 여왕, 알베르 모나코 왕자 등 전 세계 왕족을 비롯해 핀란드,
아이슬란드 대통령 등 1200 여 명이 참석했다.
신랑과 신부는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등 인근 국가의 황태자와 태자비 등으로 구성된
들러리 10 명과 함께 식장에 입장했으며 결혼 서약을 맹세하는 순간 눈물을 보였다”고 전했다.
마딜렌 공주 칼 필립 왕자
이들은 마차를 타고 4 만 송이의 장미, 수천개의 스웨덴 국기로 장식한
스톡홀름 거리를 25 만명의 시민들이 환호 속에 행진.
이들은 마차로 스톡홀름 항구로 나가 해군 장병이 호위하는 왕실 전용
요트에 승선. 항구를 건너면서 선상에서 해군 함대와 잠수함 에서 경례를
표하는 해군 장병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들 부부가 탄 왕실 전용 요트가 왕궁 선착장에 도착하자
해군 장병들과 수많은 시민들이 환호했고 전투기 16 대 편대가
저공 축하 비행 .
이어 스웨덴 국왕과 왕비가 주최하는 결혼식 피로연이 궁에서 열렸다.
스웨덴 왕실 발표에 의하면 베스틀링에게는 ‘베스테르예틀란드의 공작,
다니엘 왕자’라는 작위와 칭호가 부여한다고 밝혔다.
중세 이후 평민에게 작위를 부여한 적이 없어 이는 역사상 초유의 영광이다.
다니엘은 스톡홀룸에서 북쪽으로 193 km 떨어진 오켈보 출신.
다니엘의 고향 오켈보에서도 주민들이 초대형 야외 바비큐 파티로 축제
벨기에, 스페인, 일본, 요르단, 모나코 왕실 등 세계 각국의 왕실 가족
대표를 포함, 하객 약 1200 명이 이들 결혼식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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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
기자조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일부 족보에 자주 등장하는 나라이므로 참고로 보시면 됩니다.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대표적인 역사책은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 등인데, 사서마다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그 밖의 기자에 관한 기록들은 모두 이들 세 사서에 그 유래와 근거를 두고 있다.
《상서대전》에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망시키고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하자, 그는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주의 책봉(冊封)을 받은 기자는 부득이 신하의 예를 차려야 하였으므로 BC 1100년경(무왕 13)에 주나라에 가서 무왕을 만났는데, 무왕은 그에게 홍범9주(洪範九疇)에 대해서 물었다고 한다.
또, 《사기》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무왕이 은을 정복한 뒤 기자를 방문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를 묻자 홍범9주를 지어 바쳤다. 이에 무왕이 그를 조선왕으로 봉해주었으나, 기자는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한서》의 지리지 연조(燕條)에는 은나라가 쇠하여지자 기자가 조선에 가서 그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 양잠, 베짜기 기술을 가르쳤더니, 낙랑조선(樂浪朝鮮) 사회에서는 범금팔조(犯禁八條)가 행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위략(魏略)'에서는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準王. 고조선 마지막 왕)을 기자의 후예로 기술하였으며 '삼국지'는 이것을 인용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먼저 문헌상으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자는 기원전 1100년 전후의 인물인데,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쓰여진 《논어》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은 없고 기자의 존재 자체만 언급하고 있다.
기자동래설이 사실이라면 이들 기록에 그에 관한 언급이 있을 법한데 그렇지 않다. 그런데 기자의 동래 사실을 전하는 사서들은 한결같이 모두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여진 것들이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한 기자동래설은 기원전 3~2세기 무렵에 중국인들이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조작해낸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실제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면, 황하유역과 만주,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문화가 긴밀하게 관련되어야 함에도, 동북아시아의 청동기문화는 비파형(琵琶形)동검문화로 특징되듯이, 계통상으로 중국 황하유역의 것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뿐만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예의범절과 문화를 전하였다면, 은나라에서 사용된 갑골문(甲骨文)이 고조선지역에서 발견되어야 함에도 현재 발견된 예가 전혀 없다.
이처럼 기자동래설의 모순점이 밝혀지면서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먼저 기자조선을 고조선 내부에서 등장한 새로운 지배세력, 즉 한씨조선(韓氏朝鮮)의 등장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었다.
즉 후한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주나라 선왕(宣王) 때 한후(韓侯)가 연나라 근처에 있었다. 그후 한의 서쪽에서도 성(姓)을 한(韓)이라 하더니 위만(衛滿)에게 망하여 바다로 옮겨갔다.(…立姓韓 爲衛滿所伐 還居海中)”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바다로 간 자는 바로 준왕(準王)이므로 그의 성은 기씨가 아니라 한씨이며, 중국인이 아니라 한인(韓人)인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후대에 기자를 한씨의 먼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의 성인을 자기의 조상으로 함으로써 가문을 빛내기 위함이었으며, 특히 기자릉(箕子陵. 고려 숙종때 평양에 축조)이나 기자묘(箕子墓)가 생기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의 사대사상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 1970년대에는 한국 민족의 기원을 종족이동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기자조선의 실체를 재조명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동이족의 일파인 기자족이 화북방면에 있다가 은주교체기(殷周交替期)와 춘추전국(春秋戰國)과 같은 격동기에 북중국, 남만주, 평양으로 이동하여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기존의 사료를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한 점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내용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기자는 특정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기국(箕國)의 제후'를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 《춘추좌씨전》에는 주나라 초기의 제후국으로서 '기국'이 보이며,
《국어(國語)》에는 기국을 정복한 진(晋)나라 고대의 성씨에 기씨(箕氏)가 있다는 사실이 전한다. 또한 기후(箕侯)를 중심으로 한 기씨 일족이 주(周) 초기에 북방의 정복활동에 종사하다가 뒤에 산시(山西)에서 산둥(山東)으로 이봉(移封)되었다는 기록들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기국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후(箕侯)' '기(箕)' '기후방정(箕侯方鼎)' 등의 명문이 새겨진 은나라, 주나라의 청동기가 중국 각지에서 출토되는 것도 그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유력한 증거로 제시된다. 다만 이 견해는 기국(箕國)이 기자조선을 말하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기자조선과 고조선은 어떠한 관계였는지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위의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이 타당한가는 현재로서 명확한 답을 줄 수 없다. 다만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기자동래설 그 자체는 부정된다 하더라도 자료의 해석방향에 따라 그것이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는 측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상고사(上古史)에 대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기자조선에 관한 자료는 그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 실제로 은주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으로 이동하여 왔는데, 기자동래설은 바로 이같은 주민이동과 그에 따른 고조선의 사회변동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다. 더욱이 기자동래설을 고려와 조선시대에 사실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자묘를 세우고 국가 차원에서 숭배하였다는 점에서도 기자조선 문제는 한국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고 볼 수 없다.
기자후예 또는 기자를 따라왔다고 하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 기자의 후예 ]
행주 기(奇)씨 , 서(徐)씨 , 태원 선우(鮮于)씨 , 청주 한(韓)씨 [ 기자와 같이온 성씨 ]
해주, 태인 경(景)씨 , 토산 궁(弓)씨 , 봉화 금(琴)씨 , 밀양, 함평 노씨(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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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 < 徐 熙 > 942 ~ 998
광종 23년 < 972년 > 壬 申 ( 임신 )에 봉명사신으로 송나라에 갔다.당시 고려에서는 송나라와 10여년 동안이나 왕래가 없었는데,서희가 사신으로 가자 그 행동이 절도있고 예법에 맞았으므로 송나라 태조가 가상히 여겨서 검교병부상서를 제수하였다.
성종 12년 < 993년 > 에 거란이 침입하자,서희는 중군사가 되어 시중 박양유와 문하시랑 최량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북계에 나아가 적에 대비하고 있었다.성종이 친히 방어하고자 서경 < 평양 >에 행차했다가 안북부로 진군하려 하였는데 거란 동경유수 소손녕<황제 사위>이 봉산군을 함략시키고 고려 선봉군사와 급사중 윤서안 등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더 진전하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서희가 군대를 이끌고 봉산군을 구원하러 나가니,소손녕이 공언하기를 " 우리 나라가 이미 고구려 옛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는데,지금 너희 나라가 우리 강토를 점령하였기 때문에 토벌하러 온 것이다 " 하였다.또 서신을 보내기를 " 우리 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아직까지 귀부치 않는 나라는 기어코 소탕할 것이다.지체하지 말고 항복하라 " 고 하였다.서희가 이 글을 보고 돌아와서 그들과 화친할 가능성이 있음을 아뢰었다.
성종은 감찰사헌 차예빈소경 이몽전을 거란 병영으로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소손녕은 또 서신을 보내어 80만 군사가 도착하였다.만일 강변까지 나와서 항복하지 않으면 섬멸할 것이니,군사들을 빨리 우리 군영 앞에 와서 항복하라 고 하였다.그래서 이몽전이 거란 병영에 가서 침략한 저의를 물었다.소손녕이 대답하기를
너희 나라가 백성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하늘을 대신해벌주러 온 것이다.만일 화친하려거든 빨리 와서 항복하라고 하였다.이몽전이 돌아와서 보고하자 성종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의논하였다. 어떤 사람은 왕은 서울로 돌아가고,중신들로 정하자고 하였다.성종은 땅을 잘라주자는 의견에 따를 생각으로 서경 창고를 열어
쌀을 백성들에게 마음대로 가져가도록 하였다.그러고도 많은 쌀이 남자 성종은 이 쌀이 적 군용이 될 것을 염려하여 대동강에 버리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서희가 아뢰기를 식량이 넉넉하면 성을 지킬 수 있고 싸움에서 승리할 수도 있습니다.전쟁 승패는 병력이 강하고 약한 데만 달린 것이 아니라,적 약점을 잘 알고 행동하면 되는 것입니다.어찌하여 식량을 버리려고 하십니까? 더구나 양식은 백성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설령 적에게 이용될지언정 어찌 헛되이 강에 버린단 말입니까? 이것은 또한 하늘 뜻에도 부합되지 않는 것이라 생각됩니다.라고 하였다.성종께서도 그의 의견을 옳게 여겨 그만두게 하였다.서희는 또 아뢰기를 거란 동경으로부터 우리 나라 안북부에 이르는 수백리 사이는 모두 생여진이 차지하고 있던 곳인데,광종 때에 이것을 취하여 가주.송정.등 성을 쌓았습니다.지금 거란이 침략한 의도는
이 두개 성을 탈취하려는데 불과합니다.그들이 고구려 옛땅을 찿겠다고 공언하는 것은 실상은 우리를 협박하려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지금 거란 병세만을 보고 경솔하게 서경 이북땅을 떼어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그뿐만아니라 삼각산 이북 또한 모두 고구려 옛 강토인데,그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끝없이 강요한다면 다 내어 주시겠습니까? 하물며 국토를 떼어준다는 것은 만세 치욕입니다.바라건대
임금께서는 수도로 돌아가시고 저희들로 하여금 적과 한번 싸워본 뒤 논의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또 전직 민관어사 이지백도 아뢰기를 태조께서 나라를 창건한 후 대통을 이어옴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그런데 한 사람 충신도 없이 모두들 국토를 떼어 경솔하게 적에게 주자고 하니,이 어찌 통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옛 사람 시에 천리 강산 얻기 위해 어린 아들 가벼이 했는데,이를 주자 하는 저 초주 두 조정 문무백관들을 한하노라.하였습니다.대신이 된 초주가 후주 <중국 삼국지 촉나라 마지막 임금 >에게 권하여 국토를 위나라에 바쳐 천추의 웃음거리가 된 것을 말한 것입니다.
청컨대 금은보기를 뇌물로 소손녕에게 주고 그 속마음을 타진해 보십시오.또한 국토를 경솔히 적국에 할양하는것 보다는,차라리 선대로부터 전하여 오던 연등회.팔관회.선랑 등 행사를 다시 거행하고 다른 나라 풍습을 본받지 말아서,국가를 보전하고 태평을 누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만일 그렇다고 생각하신다면,먼저 신명에게 고하고,그 다음에 싸우거나 화친하는 문제는
왕의 생각대로 결정하십시오 하였다. 이에 성종도 그들 주장을 옳게 여겼다.당시 성종은 중국 풍습을 모방하기를 즐겼는데,나라 사람들이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 까닦에 이지백이 이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소손녕은 이몽전이 돌아간 후 오랫동안 회답이 없자 드디어 안융진을 공격하였다.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맞아 싸워서 물리치니, 소손녕이 감히 다시 진격하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독촉하였다.성종이 화통사로서 합문사인 장영을 거란 진영에 보냈는데,소손녕은 다른 대신을 우리 군영 앞에 보내어 면담하게 하라고 요구하였다.
장영이 돌아오니 성종은 여러 신하를 모아놓고 물었다.누가 거란 진영으로 가서 언변으로 적병을 물리치고 만세에 남을 공을 세우겠는가?아무도 응답하고 나서는 자가 없는 가운데 서희가 일어나서 제가 비록 부족하지만 감히 왕명을 받겠습니다.라고 말했다.그래서 왕은 강가에까지 나가서 그의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전송하였다.
서희는 국서를 가지고 소손녕 진영으로 가서 역관으로 하여금 회견하는 절차를 물었다.소손녕이 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그대는 뜰에서 나에게 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서희는 신하가 임금을 뵐 때에는 뜰 아래에서 절하는 것이 예이다.그러나 두 나라 대신이 대면하는 좌석에서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고 반대했다.재삼 말했으나 소손녕이 고집하므로,서희는 화를 내며 숙소로 돌아와서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소손녕이 마음속으로 그 인품이 비범함을 생각하고,
마침내 당 위에서 대등하게 대면하는 예식 절차를 승락하였다.이리하여 서희는 소손녕 진영 문 앞에서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소손녕과 뜰에서 마주 서서 읍한 후에 당위로 올라가 예를 행하고 동서로 대좌하였다.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나라는 옛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고구려 옛 땅은 우리 나라 소속인데 당신들이 침식하였다.또 우리 나라와 연접하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는 까닦에 이번 정벌을 하게 된 것이다.만일 땅을 떼어 바치고 국교를 회복한다면 무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서희는 말하였다.그렇지 않다.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 후계자이다.그러므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을 국도로 정하였다.그리고 경계를 가지고 말한다면 귀국 동경이 우리 국토안에 들어와야 한다.당신이 어떻게 우리가 침범했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또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인데,지금 여진이 그 중간을 점거하고 있으면서 완악하고 간사스러워
육지로 가는 것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도 왕래하기가 더 곤란하다.그러니 국교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탓이다.만일 여진을 구축하고 우리 옛 땅을 돌려주어 거기에 성과 보루를 쌓고 길을 통하게 된다면,어찌 국교를 맺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약 나의 의견을 귀국 임금에게 전달한다면 어찌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하니, 그 강개한 말을 듣고 소손녕도 강요하지 못할 것을 알고 드디어 담판한 내용을 자기 나라에 보고하였다.거란 임금은 고려가 이미 화의를 요청하였으니 군사를 철수시키라고 하였다.
소손녕이 위로연을 베풀고자 하니,서희는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는 잘못한 일이 없었지만,귀국 대군이 멀리까지 동원되어 왔기때문에,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임금이나 신하 모두가 황급히 무기를 손에 잡고 전쟁터에 나온지가 여러 날이 되었다.어찌 잔치하고 즐기겠는가? 하였다.그러자 소손녕은 두 나라 대신이 만났는데 어찌 친목하는 예식이 없을 수 있겠는가? 라며 굳이 요청하니,이를 수락하고 매우 즐겁게 놀고 잔치를 마쳤다.서희는 거란 영에서 7일간 체류하다가 돌아왔다.이때 소손녕은 낙타 10마리,말 100필,양 1000마리와 비단 500필을 예물로 주었다.
성종은 서희가 화의에 성공한 것을 알고 대단히 기뻐하며 강가에까지 나와 맞이하고 곧 박양유를 예폐사로 삼아 소손녕 영에 보내려 하니 이때 서희가 다시 왕에게 아뢰었다.제가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소탕하고 옛땅을 회복한 뒤에 국교를 정상화 하기로 하였습니다.지금 겨우 강 이쪽 땅을 회복했을 뿐이니,강 저편 땅까지 회수될 때를 기다려서 국교를 정상화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하였다.그러나 성종은 오랫동안 왕래가 없으면 또 무슨 후환이라도 생길까 염려되어 파송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드디어 사신을 보내었다.
성종 13년 < 994 >에 서희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여진을 내쫓고,장흥.귀화.두 진과 곽주.귀주 두 고을에 성을 쌓았다.그 이듬해에는 또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선주.맹주 두 고을에 성을 쌓았다.
성종 15년 < 996 > 에 서희는 병으로 개국사에 있었다.성종은 친히 가서 문병하고 어의 한벌과 말 세필을 사원에 나누어 시주하고,또 곡식 1000석을 개국사에 시주하여 서희 병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일들을 다 하였다.이듬해에 관리의 녹봉을 줄 때에 서희 병이 아직 완치되지 못했기 때문에,왕은 주관 부서에 명령하여 서희 나이가 아직 치사할 때는 되지 않았으나,병 때문에 근무하지 못하니 치사록을 주라고 하였다.
목종 원 년 < 998 > 에 졸하니 나이 57세였다.목종은 부음을 받고 몹시 애도하고 베 1000필, 보리 300석, 쌀 500석,뇌원차 200각,대차 10근, 전향 300 냥을 부의로 주고,예식을 갖추어 장사를 치르게 했으며,장위 라는 시호를 내렸다. 현종 18년 < 1027 > 에 성종 묘정에 배향되고,덕종 2년 < 1033 > 에 태사 ( 太 師 ) 에 추증되었다. 아들로는 서눌.서유걸.서유위.서주행 이 있다.
고려사 제7권. 이천서씨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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